이정현목사설교

  • 홈 >
  • 예배 · 설교 >
  • 이정현목사설교
이정현목사설교
2019 2 24 - 예수님의 순종과 그 결과 이정현 목사 2019-02-24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424

http://www.isomang.net/bbs/bbsView/13/5546324

[성경본문] 빌립보서2:5-11절 개역개정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24, 2:5-11, 예수님의 순종과 그 결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로 글을 쓴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을 다음의 몇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로 좋은 사람은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세상이 워낙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까, 상식이 통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정의나 진리가 아닌 재물이나 힘, 권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세상에서, 상식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기에,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조금 더 높은 단계의 좋은 사람은,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즈음에는 한결같다는 말을 들어보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느 빵집 주인이 고발을 당했습니다. 고발을 한 사람은 이 빵집에다 버터를 공급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발한 이유는 식빵의 크기가 작아졌다는 것입니다. 법관은 빵집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식빵의 크기를 줄였습니까? 그러자 빵집 주인은 억울하다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해서 아직 저울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밀가루와 버터를 반죽할 때 날마다 버터를 저울 삼아 거기에 맞추어 밀가루 양을 부어서 반죽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빵이 작아졌다는 것은 밀가루를 적게 쓴 게 아니라, 버터가 작아졌던 것입니다. 빵집 주인의 잘못 보다는, 빵집 주인을 고발했던 버터 공급업자가 한결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람이 상식이 통하는 사람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 했습니다.

더 높은 단계의 좋은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항상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말과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는 사람이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 중의 한 구절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사랑도 많았고 전도에 열심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점으로, 교인들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아버지로서, 교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어려운 현실을 잘 이겨나갈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세우려면, 무엇보다 서로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은 겸손과 순종이었습니다. 모두 겸손한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을 품을 때, 교회가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여기서 가장 훌륭한 실례로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종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낮추신 겸손에 관한 말씀이 6절과 7절 두 구절인데 먼저 6절부터 보겠습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인격으로 존재하십니다. 그 세 인격은 관계론적 차서관계에서 1, 2, 3위로 부르지만, 그것이 신적 권위 차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 인격은 신적 권위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그런 선상에서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의 본체는 하나님에 대한 모형이나 모조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곧 성자 예수님은 본질과 성품과 지위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그 위치를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7절처럼,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말은,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 자원하는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시고 만유의 창조주이신 그 분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셨습니다(made Himself nothing). 사실 그리스도는 너무 크시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비우지 않으시면, 결코 이 작은 세상이 품거나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세상 가운데 오시기 위하여, 주님은 자기 스스로를 비우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자기를 비웠다는 말은, 그의 신성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를 버리고 사람으로 위치로 내려왔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있던 신성(神性)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사람과 같이 되셨던 것입니다. 신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이 상상이나 갑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처럼 되신다는 것이 상상이나 됩니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시고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 위로 내려오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인간이 화장실 밑의 구더기가 되는 것보다, 자기를 더 철저히 비운 처사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물인 구더기로 내려가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신이요 창조주이신 그분이 인간 세계로 그것도 종의 형체로 오신다는 것은 잇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오셨습니다. 창조자가 피조물 세계에, 초절자가 물질의 세계에 참여한 이 성육신(成肉身) 사건은 그분의 가장 겸손함을 들어내는 사건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이 겸손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교회 안에서 다툼이 없이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의 길이고 자기를 낮추는 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본 받아 겸손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소망교회의 모든 식구들은 항상 주님처럼 겸손하게 삶으로, 주님에 의해 높임을 받는 인생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월의 주제가 순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제에 따라서 주일에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첫째 주에는 요한복음 9장을 근거로 하여,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나면서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쳐주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만나, 땅에 침을 뱉고 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주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 때, 그 사람이 주님의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가서 실로암 못에 자기의 눈을 씻었더니, 한 순간에 보게 되었습니다. 순종이 기쁨과 자유와 축복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둘째 주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한 아브라함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22:1-14).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순종하였을 뿐만아니라,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축복을 재약속 받은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에는 예레미야 35장을 근거로 레갑 족속의 순종과 거기에 따른 복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도 레갑 족속들처럼 신앙을 잘 이어받아서 신앙의 명문 가문을 이루자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순종, 즉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레갑의 족속들보다, 더 감동적이고 가치 있고 고차원적이고 온전한 순종이 바로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철학자 시세로(Cicero)가 말한 대로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죽음을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범죄 하였습니다. 언약의 내용대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죄 값을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죽음입니다(6:23). 죄인의 죄를 속()하기 위해 피 흘려 죽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17:11). 그 일을 대신 실현하기 위해,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육신하셨고, 각종 고난을 경험하시고, 마침내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 사건이야말로 순종의 극치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4대 성인을 흔히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예수라고 말을 합니다. 이들의 죽음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동양의 성인으로 여겨지는 공자(BC 551-479)72세에 자연사 했고, 석가모니(BC 624-544)80세 자연사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양의 성인으로 불리는 소크라테스(BC 470-399)는 독인 든 잔을 마시고 사형을 당하였고, 예수(BC4-29)는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성인들의 이 역사적인 죽음을 비교해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3사람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자기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죄와 청소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 때문에 죽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다 아담의 죄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대속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죄 때문에 죽지만, 그리스도는 의인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순종이 오늘 우리에게 미치는 가장 큰 영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의를 안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겸손하게 사셨고 또한 순종하여 사셨는데, 그러면 그 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9절부터 11절에, 세 가지의 순종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본체시나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고,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는, 한 번도 아담처럼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미우고 또 비우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에도 열두 영 더 되는 천군천사를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진 고난과 수모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도 저희를 저주하시거나 단번에 죽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들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마침내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끝까지 자기에게 순종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를 다시 살리셨고, 지극히 높은 자기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전적인 순종의 결과로 가장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동등된 위치에서 피조물로까지 낮아진 그리스도를, 다시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만유의 주()로 높여주셨습니다(11). 

두 번째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에게 굴복하고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 위치로 높이셨다는 말입니다(45:23). 땅에서 조롱하던 사람들, 배척하던 사람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자들, 얼굴에 침 밷은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의 무릎을 예수님 앞에 꿇게 될 것입니다. 그분에게 꿇어 엎드려 경배하고야 말 것입니다. 에베소서 1:22절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고 했고, 베드로전서 3:22절에서는,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의 결과는,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했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했다는 말은,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뜻이며, 또한 그 영광을 위한 모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이 고백이, 하나님께 기쁨을 준다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겸손을 본 받아서, 항상 종의 마음으로 섬기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가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와서 너희의 종이 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나처럼 사람들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겸손히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높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프란시스라고 하는 유명한 성자가 있었는데, 그의 제자가 어느 날 환상 가운데 천국에 올라가게 되었답니다. 천사가 천국의 구석구석을 데리고 다니며 좋은 데를 다 구경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 갔더니 멋있는 보좌가 하나 있더랍니다. 그래서 궁금했던 제자가, ‘이 보좌에는 누가 앉을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천사가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성 프란시스가 앉을 보좌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자가 잠에서 깼는데,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기 스승이 훌륭하고 유명하기는 하지만, 저렇게 높고 휘황찬란한 보좌에 앉을 정도의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는 것입니다. 속이 은근히 뒤틀렸습니다. 그래서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니까 프란시스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지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선생님은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성자라고 부릅니다. 선생님보다 못한 도둑놈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살인자도 있고 얼마나 못된 인간들이 이 땅에 많은데 그 사람들보다도 더 악하다고 얘기를 하면 말이나 됩니까?’ 그러니까 프란시스가 대답하기를 만약에 하나님이 내게 준 은혜를 그 사람들에게 주셨더라면, 그 사람들은 나보다 더 큰 성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이 정도가 된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도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프란시스는 주님을 본 받아 자기를 낮추고 겸손했다고 합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겸손을 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순종을 본 받아서, 끝까지 어떤 일에도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은 그 사람과 그것의 권위를 인정할 때 할 수 있습니다. 졸병이 상관의 권위를 인정할 때, 상관의 말에 순종할 수 있고, 자식이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할 때, 교인들이 목사의 권위를 인정할 때, 국민들이 나라의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할 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의 고유한 권위를 인정할 때, 거기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인정할 때,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권위를 무시하면 순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아래서 순복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같이 (표준 새 번역)으로 한 번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니,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아멘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19 3 3 -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하심에 근거한 기도 운영자 2019.03.03 0 1399
다음글 2019 2 17 - 레갑 족속의 순종의 본 운영자 2019.02.17 0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