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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7 - 내가 어찌 너를 놓겠으며 버리겠느냐 이정현 목사 201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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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일 호 11:1-11, 내가 어찌 너를 놓겠으며 버리겠느냐

 

아브라함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이 쓴 예언자들”(The Prophets)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구약의 선지자들에 관하여 면밀히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책임을 말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헤셀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은 망치고 하나님은 이루신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게 늘 망치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서만이 아니라 구약 전체, 성경 전체를 통하여서도 이 말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음란한 여인 고멜은, 호세아 선지자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서도 집을 나갑니다.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리고 같이 삽니다. 그러자 호세아 선지자가 다시 가서 값을 주고 데리고 옵니다. 이것은 선지자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반역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열열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도 인간이 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고질적인지 발견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과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일하심(역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1)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이라고 말하시면서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23절에서 처음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아직 어리다고 하십니다. 어리다는 것은 아직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서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은 그들이 강하거나 잘난 것이 있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나라보다 별 볼품없는 작은 나라였다고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불러내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라고, 신명기 7:6-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러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형통하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각종 죄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지런히 보내셔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수록 더욱 멀리한 것입니다. 바알들에게 제사하고 그들이 아로새긴 우상에게 분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를수록 멀리 도망가는 것입니다. 말 안 듣는 자식을 부르면 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리 도망가는 것처럼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청개구리 같은 이런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가 죽으라고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을 팔로 안아주셨습니다.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이 부르면 부를수록 멀리 도망가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아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을 잡고 그렇게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안아주시고 고치시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1:31-32절을 봅니다.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들을 안음같이 안아서 인도하셨으나,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안아서 인도하시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에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걸음을 가르치고 안아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제는 사랑의 줄을 묶어서 끄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끄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아니 하시면, 아무라도 주님께 올수가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4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라도 예수님께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셔야만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멍에를 벗기시고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인정의 줄과 사랑의 끈으로 둘러업고서 가슴을 풀어헤쳐 젖을 먹였다고 번역합니다. 이만큼 사랑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면, 그 사랑의 품안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돌아오기는커녕, 점점 더 멀리가려고 계책을 세우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품안에서 떠날까하면서 계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걸음마도 싫고, 품에 안아주는 것도 싫고, 음식을 먹여 주는 것도 싫고, 사랑의 줄로 당겨주는 것도 싫고 내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굽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가 그들의 임금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계책이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계책을 믿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돌아오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칼이 저희의 성읍을 치고 문빗장을 깨뜨립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는커녕, 결심하고서 물러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돌아오라고 하여도 듣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7절의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갔다는 말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에 적극 치우쳤다,’ 또는 그 일에 전적으로 메어 달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데 힘을 쓰고, 적극적으로 메어달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더 멀어지려고 힘써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함으로, 선지자들의 경고와 권면을 전혀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계획들을 스스로 다 세워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들어있는 구절이고, 본문 중에서 가장 핵심된 구절인 8-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그들을 놓지 않겠다,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 그냥 두지 않겠다, 내 진노를 쏟지 않겠다, 그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함께 불살라진 근처의 성읍입니다(29:23). 이스라엘의 소행을 보자면,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유황불에 살라져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속에서 돌아서,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듯 하기 때문입니다. 불쌍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격하여 지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의 동생 베냐민을 만났을 때, 마음이 타는듯하여 물러가서 울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이 불붙듯 하기에, 에브라임과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행대로 하자면 천번 만번 버림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의 무궁하심을 인하여 버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몇 번만 잘못하여도, 때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결코 용납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어떠한지를 성경 몇 곳을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1:20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브라임을 향하여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기뻐하는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책망을 하여도 깊이 생각하시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측은한즉, 하나님께서 반드시 긍휼히 여기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19-23절입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오직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며, 주의 성실이 크심으로 진멸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사자처럼 일어나셔서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시면 온 세상에 흩어졌을지라도, 자기 백성은 여호와를 좇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서편에서는 지중해 바다입니다. 각 섬들에서 올 것이요, 애굽은 남쪽이고 앗수르는 북쪽입니다. 동쪽은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만 그곳은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입니까? 떨면서 새 같이 비둘기 같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떨면서 오지만, 와서는 각 집에 머물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84:1-4절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의 집에 거하는 자의 복을 노래하면서, 참새와 제비도 자기 집과 보금자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흩어져서 참새처럼 비둘기처럼, 약하고 두렵고 떠는 자들이라도 주께서 불러 모으심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안전히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은 죄로 인하여 멸망을 하지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다 멸하지 않으시고, 포로 된 곳, 또는 피난 갔던 곳에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고 부르지만 듣지도 않고 멀리멀리 떠나갔고, 각처에서 우상숭배와 안식일을 범하며 하나님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 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불 붓는 사랑, 끓어오르는 긍휼하심으로 품에 안아서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BC 586년에,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남 유다가 돌아올 때, 그들도 함께 각지에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들이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고, 부르고 불렀지만 더욱더 멀리 떠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그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은 ‘...때문에사랑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사랑하십니다. 사람은 돈 때문에, 지식 때문에, 기능 때문에, 명예 때문에, 비전 때문에, 행복 때문에, 성품 때문에, 얼굴 때문에 사랑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죄악과 반역과 불순종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십니다.

 

집나간 탕자가 창기와 함께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나 먹으며 비참하게 살다가, 아버지의 집이 생각이 나서,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이 많으니까 그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해야 되겠다며, 아버지 집을 찾아옵니다. 아버지는 계속하여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마을 앞 어귀에 가서 아들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누더기 옷을 입고 신발도 없이 맨발로, 어깨가 축 처저서 힘없이 걸어오는 아들을 보자,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가서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아들 됨의 표시로 손에 가락지를 끼어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같은 탕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며 무한한 긍휼인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개 막나니 같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해 주신 것입니다.

 

)빗나간 자식 때문에, 평생을 고통과 눈물 속에서, 애태우며 보내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자식은, 노름으로 부모의 가산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폭력으로 전과도 있습니다. 이혼을 하고 혼자서, 술에 찌들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그 아들을 데리고, 노모가 파지를 주우면서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못해 이웃집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그런 자식 잊어버리지. 그러다가 병나서 일찍 죽겠어. 그런 자식 없는 셈 쳐.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만 잊어버리게.” 이 말을 듣던 노모가, 잠깐 시름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나도 잊어버리고 싶어. 그런데 그 자식이 자네 자식이라면, 나도 벌써 잊어버렸겠어.” 그런 놈도 내 자식이니까,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부패하고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닌 우리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것,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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