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에베소서5:22-2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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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엡 5:22-25, 아름다운 부부관계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형성이 되고, 형제자매들이 있으면 형제자매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그들은 다 가족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또한 옆집에 사는 사람들하고는 이웃관계를 형성하고,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관계와 졸업을 하면 동문관계나 학연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팀 관계나 상하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을 해서 부부관계를 이루며 살게 되고, 여기에서 자연히 발생되는 사돈관계나, 사위와 장인의 관계나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신혼 부부관계에서 자식이 생기면, 또 다시 반복되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이렇게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 인생이며, 이것이 모여지면 곧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참으로 오랜 기간 동안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부부관계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부부는 가정의 기본단위입니다. 두 남녀가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어야 그때 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가정의 기본 단위는 부부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기본단위도 가정이며 부부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엉망이 되면 교회도 엉망이 되고, 나아가서 이 나라도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잘되려면 가정부터 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가정과 관계하여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간통죄를 폐지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간음이 죄이며,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까지 간음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나라는 간통죄를 폐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낙태죄가 위헌이라고 폐지하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은 있겠지만, 아무튼 어린 아이의 생명을, 어머니의 권리로 낙태를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부분에 관하여 ‘태내에 있는 아기의 죽음을 초래한 자는, 살인 한 자와 똑같은 처벌을 지시하고 있습니다’(출 21:22-25). 기독교에서는 낙태가 여성이 선택할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 생명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가정과 관련하여 동성애와 동성혼을 합법화 하려고 합니다. 동성혼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고, 건전한 가정제도를 파괴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기본적인 사항을 뒤틀어 버리고 파괴하면, 결코 건강한 가정이 세워질 수 없고, 그러면 결코 건강하고 든든한 나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부부관계가 되려면 결혼제도를 그쳐야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한 몸을 이루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제도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신령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여러 여자를 상대로 결혼 관계를 맺거나, 한 여자가 여러 남자와 부부관계를 맺을 수는 없고, 또한 동성혼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간통이나 낙태나 동성혼이나 1부 다처나 1처 다부는 전부 성경을 위반한 죄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런 것들을 법적으로 죄가 아니라고 말함으로, 성경의 진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의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이런 것이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죄라면 죄이고, 성경이 죄라면 죄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나라와 민족과 위정자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의 진리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기준 진리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본문을 근거로 제목을 ‘아름다운 부부관계’로 잡았는데, 굳이 ‘아름다운’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은 것, 또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좋은 것을 아름답다고 보고 이 말을 붙인 것입니다. 우리의 주관에 의한 좋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좋은 것, 의미 있고 가치 있고 행복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부부관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참 행복한 부부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부관계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되고, 그리고 남편은 아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복종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임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순종해야 할 순종의 대상을 분명히 정해 주었습니다. 자기 남편입니다. 외간 남자가 아니고 다른 아내의 남편도 아닙니다. 자기 남편입니다. 다른 남자에게 복종한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큰 사단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내가 남편에게 그래야 되지요?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머리라는 말은 ‘근원’과 ‘권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그 아담에게서 여자를 만들었음으로 여자의 근원은 남자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하나님이 세운 권위자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아내와 남편이 평등하게 지음을 받았지만 그 기능은 다른 것입니다. 남자는 지배하는 성향을 주셨지만, 여자에게는 순복하는 성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능에 따라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창조질서에 맞다는 것입니다.
복종하고 순종하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습대로 존중해 주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위치를 인정해 주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운 줄 알고,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한 것 같이, 존중해야 합니다(창2:8, 3:16, 4:19, 고전11;3, 8-9, 벧전3:6, 골3:18-19, 딤전2:11, 벧전3:1). 교회가 주께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복종하는 것은 그를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심정과 원리로 남편의 위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의미로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매사에 아내가 남편을 쥐고 흔들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면 안 됩니다. 조금 못나고 부족하고 어리석어도, 자기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교회가 매사에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범사에 복종해야 합니다. 여기의 복종이란 말은 굉장히 강한 말입니다. 복종은 무조건 따라야 된다는 뜻입니다. 좋을 때도 따르고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따르는 것이 복종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절대 복종하듯이, 아내도 남편에 대해서 복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분 좋을 때만 따라가지 말고 기분이 나쁠 때도 공경하고 따라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의 사랑이란 자기를 희생하고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8절에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뿐만아니라, 베드로전서 3장 7절에서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서 귀하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9절에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든지 아내를 괴롭히지 말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는 권면입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말씀을 듣고, 아내들이 이것은 너무 과한 말씀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제로 남편에게 주어진 말씀이 더 과하고 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남편들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주님이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처럼, 희생적 시랑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아내를 위해 내어주는데 피 흘리기까지 희생하는 것입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시시하고 쩨쩨하고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희생적이고 한없이 넓고 무조건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이렇게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어떤지 아십니까?
스페인 남부 말라가 근방의 이슬람 사원에서 코란 교사로 일하는 이맘 모하메드 카말 모스타파가 지은 책 “이슬람의 여성들”이 있습니다. 유럽 등지에 사는 이슬람 신도들에게 정통 이슬람교의 여성관을 설명해 주기 위해 지은 책이랍니다. 그 내용에는 ‘아내를 때릴 때는 얼굴, 머리, 가슴, 배를 피하고 가는 회초리로 손이나 다리만 때려 상처를 남기지 말라.’ 또 아내를 제재하는 방법은 우선 말로 타일러 본 뒤 안 되면 ‘최고의 형벌’ 인 성관계 중단을 시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슬람교인들은 여성을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을 다루는 법이 아니라 여성을 학대하는 법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여성을 때린다는 자체는 옳지 못합니다. 세계 각처에서 많은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이처럼 학대를 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에도, 여성들은 직업을 가지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사회 구조 속에 있었습니다. 재산을 소유할 수도 없었고요, 자식 그것도 아들이 없으면 거지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당시 여성들의 삶이었습니다. 남편의 재산을 아내가 상속하는 법이 없었고, 오직 아들만 상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남편에게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당시의 여성들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여성들이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여성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성들은 법정에서 증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여성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남성들이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많아 젊은 남성들이 적었고, 일부다처 제도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던 시절입니다. 아내를 쉽게 버릴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유대의 어떤 랍비는 아내가 음식을 잘못 요리하면 아내를 버려도 좋다고 가르쳤습니다. 아내가 길에서 낯선 남자와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남편은 아내를 버려도 좋다고 가르치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에 살고 있는 남성들에게, 바울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하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고 창조의 질서요 하나님의 설계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사회가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는, 남편은 자기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칭찬을 많이 받으며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혼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꿀 만큼 가난했었습니다. 그러다 결혼 12주년 즈음에 교회에서 신혼여행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살아오면서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렀던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나…. 사실 한글을 몰라요. 중학교 나왔다는 거….” 아내의 눈물이 남편의 가슴을 적셨습니다.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순간만큼 아내가 사랑스럽고 애처로웠던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처럼 남편으로서 미안하고 죄스러운 때가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속였다고 비난하고 정죄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로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부부는 초등학생인 두 아들하고 마주 앉았습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엄마는 부모님을 잃었어. 친척집에서 자랐지만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교에도 갈 수 없었지. 그래서 엄마는 아직 한글을 몰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해. 여태 엄마의 그런 아픔을 모르고 있었던 아빠가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 아빠는 엄마한테 한글을 가르쳐주고 싶어. 너희들도 도와줄 거지?” 저녁마다 네 식구가 둘러앉아 공부를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한글부터 가르쳐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숙제를 하고 아내는 가갸거겨를 쓰고 남편은 성경을 필사했습니다. 아내는 3년 만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아이들은 우등생이 되었고 방학 때마다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허물을 덮어주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배우자에게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기를 결심하고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남편의 마음이야말로 진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아내를 위해 시장은 그만”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일본의 ‘다카스키’라는 도시의 ‘에무라’라는 시장이 자기의 아내의 간병을 위해 시장직을 물러났다는 기사였습니다. 에무라 시장은 시민들의 신임을 받아서 4번이나 시장에 뽑혀 15년간이나 시장을 했는데 다음번에도 당선이 확실한 유망한 시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파킨슨병에 걸려 치매현상이 일어나자 아내의 병을 간호하는데 최선을 다하려고 시장직을 사임한 것입니다. 신문기사에서는 에무라 시장이 시장 재임 시절에는 유능하다고 인정받았으나 물러난 지금에야 시민들에게 진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 된 마음으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에무라 시장이었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남자와 여자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창조되었음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했습니다. “남자는 전체를 보고, 여자는 세부적인 것을 본다. 남자는 논리적이지만, 여자는 직관적이다. 남자는 쉽게 결정하지만, 여자는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남자는 감정의 변화가 둔하지만, 여자는 감성이 쉽게 변한다. 남자는 목표 지향적이지만, 여자는 관계 지향적이다. 남자는 객관적이지만, 여자는 이상적이다. 남자는 방랑적이지만, 여자는 정착적이다. 남자는 존경을 중히 여기지만, 여자는 사랑을 중히 여긴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분명한 것은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과, 남편은 자기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할 때,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순종과 사랑의 관계가 되려면, 그 중간에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순종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인내로 순복하고, 남편이 사랑할 수 없는 경우에도 인내로 아내를 사랑하면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내하심으로 순종하고 사랑하심으로, 아름다운 부부관계를 가지길 바랍니다.
어느 신문에 게제 된 가정을 위한 기도문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저희들의 하늘 아버지시여,
이 땅에 좋은 가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가정이 방, 부엌, 가구들이 진열된 건물이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정이 오가는 사람들의 천국이 되게 하소서.
제각기 들어와 자고 나가는 여관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정성 주고 시간 주고 미소를 주는 대화의 광장이 되게 하소서.
위로를 기대하기보다는 다른 식구들을 먼저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이해하게 하시며
가시 돋친 말이나 비평, 원망이나 불평보다도 감싸주고 격려해주는 가족이 되게 하소서.
우리 가정이 어린아이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교실이 되게 하시고
젊은 아이들에게 언제나 의지되는 마음의 고향이 되게 하소서.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모시고 해결의 길을 찾게 하시고
아이들의 문제가 있을 때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우선 모시고 의논하게 하소서.
우리 가정이 작은 천국이 되게 하시고 평화의 안식처가 되게 하시며,
믿음, 소망, 사랑의 연습장이 되게 하소서.
거룩한 제단이 되게 하소서.
오, 주님이시여!
저희 가정이 이웃과 이 세계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복음의 누룩이 되어
주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아름다운 터가 되게 하소서.
자손대대 영원토록 예수의 향기를 떨치는
그리스도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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