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에베소서2:11-18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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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엡 2:11-18,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
본문 성경에 보면 화평(14, 15), 화목(16) 그리고 평안(17)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세 단어가 본문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본 설교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알고, 서로 교차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 제목을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잡았는데, 이 말은 11절에 근거하여 있습니다. 11절 초반부에 보면 ‘생각하라’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이 바로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에 근거하여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수평적인 관계를 화평케 하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 중에 있으며, 아시아의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에베소교회는 유대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방인이었고, 또한 할례를 받지 않은 무 할례당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할례 없는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자기들만이 선민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다 이방인으로 취급을 하면서, 할례가 없는 무 할례당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 취급하였고, 하루를 살면서 이방인을 만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고, 하나님이 지옥불의 연료로 쓰기 위하여 이방인을 만들었다고 했고, 혹시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을 하는 날이면 곧 그날이 그들의 장례식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였고 인격적으로 모독하였던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과거에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유대인들로부터 이렇게 취급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과거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20). 여기서는 믿기 이전 이방인들의 비참한 상태를 5가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1)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이것은 에베소교회의 이전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오는 빛과 거룩과 진리와 소망이 아직 그들에게 없었다는 말입니다.
2)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의 시민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3)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인데, 이 언약에서 제외된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4)세상에서 소망이 없었다. 이 말이 당연했던 것은 당시의 최강국이었던 로마와 그리스에는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에베소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소망이 없었던 것은 당연했던 것입니다.
5)하나님도 없었다. 수많은 잡신들이 그들에게 있었지만, 참 신이시며 유일하신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암울하고 비참한 표현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에베소교인들의 과거에는 비참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과거에 이랬을 뿐만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과거에도 똑같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선민이 아니었고, 언약에서 제외된 백성이었고, 소망이 없었고, 하나님도 없이 살았던 무지목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같이 무지 목매한 인간으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며 살면서, 한걸음 한걸음 지옥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전혀 얻지 못하였고, 마귀의 자녀로 흑암의 권세에 매여, 죄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에서 이제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1절과 12절에서는 ‘그때에’라는 말로 과거를 설명했지만, 다음구절에서는 ‘이제는’이라는 말로 현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 옛날에는 멀리 있었는데, 이제는 가까워졌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의 ‘멀리 있던 너희가 가까워졌다’는 말에서, 누구에게서 멀리 있다가 누구에게로 가까워졌다는 말인가요? 그것은 에베소교인들이 과거에 유대인에게서 멀리 있다가, 이제는 유대인들과 가까워졌다는 말입니다. 이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둘 사이의 관계, 즉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화평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도 기독교인이 되고, 이방인도 기독교인이 됨으로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는 말에서 ‘그는’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그 자신’, 혹은 ‘오직 그 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화평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율법 준수나 공로나 그 어떤 제사나 다른 어떤 방법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만이 화평케 하실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한 담을 자기 육체로 허셨습니다. 그분이 의문의 율법을 폐하시고 한 새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둘 사이에 증오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간에 막힌 담’(AV, middle wall of partition)입니다. 이것을 RSV에서는 ‘적대감으로 나누어진 담’(dividing wall of hostility)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적대감으로 나누어진 담이 어떤 담인지를 알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를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앙 뒤쪽에 지성소와 성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서 제사장들의 뜰이 있습니다. 그 동쪽에는 이스라엘의 뜰이 있고(유대 남자들), 더 동쪽에는 여자들의 뜰(유대 여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 뜰은 그 높이가 성전의 높이와 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의 뜰에서 다섯 계단을 내려오면 길게 둘려 쌓여진 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담 넘어가 바로 이방인의 뜰인 것입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여자들의 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긴 장벽이 바로 적대감으로 나누어진 담인 것입니다. 이 벽은 높이가 1.5m 정도 되는 벽인데, 중간 중간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적혀 있습니다. “침입자는 처형된다.” 이방인들은 이곳에서 성전을 볼 수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안으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 담을 넘어 여인의 뜰 안까지만 들어가도 그들은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이방인의 뜰까지도 장사꾼들이 독차지하여, 이곳에 모여 기도할 수 없었으므로, 주님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내 쫓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 편지를 쓰기 약 3년 전에, 자기가 한 이방인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큰 화를 당할 뻔 했던 경우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이방인이 바로 에베소교인이었던 드로비모였습니다(행 21:27-31). 그러므로 바울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보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나, 성전의 구조로 보나, 자기의 경험으로 보아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중간에 막힌 담’이 얼마나 두껍고 높은 장벽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그 장벽을 허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적대감에 의해 쌓인 담을 일격에 부셔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이 이방인이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구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일한 시민이요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19). 제 3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소외는 화해로 바뀌었고, 적대감은 화평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주님만이 수평적인 관계를 화목케 하신 진정한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2. 예수님은 수직적인 관계를 화목케 하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관계를 화평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도 화목케 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화해를 다룰 뿐 아니라, 근본적인 화해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다루고 있습니다. 16-17절의 말씀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앞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화평케 하신 부분을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좀 더 본질적인 화목의 관계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불화한 사이였고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였고 불순종하였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 되었고 원수관계였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롬 5:6-10). 십자가의 기이한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맘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주님이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로 ‘화목’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화목제물로 인하여, 먼데 있는 사람과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평안이 전하여졌습니다. 17절에서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말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말하는데, 그들에게 동일하게 그리고 동등하게 평안이 전하여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가까이 있게 되었고, 주님과 하나님과 가까이 있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동일한 샬롬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유대인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동일한 평안을, 이방인 신자들도 마음 것 누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오래 전 이사야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57:19)고 하신 말씀을 근거로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에베소교인들이 유대인들과 화평을 이루었을 뿐만아니라, 이제 하나님과의 화목도 이룬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이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이들이, 세상에서 전혀 소망이 없었던 이들이, 하나님 없이 절망 속에 있었던 이들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이제는 그의 평안을 누리며 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런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3.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18절의 말씀은 이방인으로서 유대인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우리가 누리는 또 다른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도에 있어서는 항상 삼위일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그’가 그리스도이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필수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백인이든 유색인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배운자든 못 배운자든, 남자든 여자든, 늙은이든 젊은이든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 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함께 성령 안에서 유일한 중보자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아주 강력하게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감의 특권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누구든 똑같은 조건으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고(8), 전에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고(19), 전에는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는 외인이었으나 이제는 약속을 이을 자가 되었고(갈 3:29), 전에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으나 이제는 그와 화평한 자가 되었고(17),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18).
결론
우리가 평생에 걸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관계를, 주님이 화평케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유식자와 무식자,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나와 타인 사이의 막힌 담을 주님이 헐어주셔서, 화평케 해 주셨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2)무엇보다도 나와 하나님 사이는 원래 원수지간이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심으로), 화목케 해 주셨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주님은 수평적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수직적 관계에서도 우리의 화평이심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3)이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화평이심을 잊지 말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아울러 이 사실을 전파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화평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면, 마땅히 그 화평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평화의 사도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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