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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7 7 - 욥의 인내는 곧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다 이정현 목사 2019-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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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욥기42:7-17절 개역개정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42:7-17, 욥의 인내는 곧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이다.

 

7월의 주제가 오래 참음인데, 다른 말로 인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내의 사전적 의미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에 대한 속담이나 격언도 많이 있습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궁극적인 차이는 인내에 있다.’ ‘꿀을 모으려는 사람은 벌의 침을 참아야 한다.’ ‘참을 인자가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

 

한글 신약성경에는 인내라는 단어가 23회 나오지만, 애석하게도 구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성경에 인내라는 의미의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고 할 때(34:6), 이는 곧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다는 뜻으로, 곧 오래 참으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나,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은혜로우신 분이시고, 자비롭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있는 악과 사악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나타내기에,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오래 참음과 인내가 같은 의미의 단어라고 말했는데, 원문을 근거로 엄밀하게 따지면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래 참은 오래(long)를 강조하는 참음이라면, 인내는 중압(under)을 강조하는 참음이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께 해당되는 속성이라면, 후자는 인간이 되신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미덕이라고 봅니다. 또한 전자가 참을 수도 있고 안 참을 수도 있는 선택적인 상황에서의 참음이라면, 후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적인 상황에서의 버티어 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는 시간적으로도 오래 참아야 하고, 어려 고통과 억압 속에서도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욥기서의 마지막 부분이지만, 욥기 전체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말씀에 주의 집중함으로, 깨닫고 은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인내는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견디는 것입니다.

 

성경은 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욥은 성품적으로도 훌륭하고 신앙적으로도 뛰어나고 가정적으로는 다복하고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부자였음으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평가가 됩니다.

 

이런 욥에게 인간으로써 견디기 힘든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많던 가축과 종들이 하루아침에 다 빼앗기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10명의 자녀도 하루아침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가축의 일부가 사라진 게 아니고, 또한 자녀들 중 한 두 명이 죽은 게 아니라, 전 가축들과 전 자녀들이 한꺼번에 다 죽은 것입니다. 그것도 재산은 다 날라 갔어도, 자식들만이라도 살아 있다면 용기와 힘을 낼 수 있는데, 자녀들까지도 다 죽었으니, 그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고난들이 욥에게 한꺼번에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한 고난이 지나고 한참 있다가 또 다른 고난이 찾아 온 것이 아니라, 갑자기 재난이 연이어 찾아 온 것입니다. 115절에, ‘갑자기 이르러라는 말과 나만 호로 피하였으므로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 구절에서는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16-18)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욥에게 찾아온 재난과 고난은 갑자기, 긴박하게 찾아왔습니다.

 

이런 긴박한 고난이 닥쳤을 때, 욥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0-22).

 

이런 상황 중에 욥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예배했습니다. 여기서 겉옷을 찢었다는 말은 욥이 당한 내면의 혼란과 충격을 표현하는 것이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영광의 상실을 나타내는 행동이고, 땅에 엎드렸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시로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러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우리 같으면) 이 정도 고난과 시련이 다가오면, 예배는 무슨 예배, 술 퍼먹고 세상을 비관하며 죽고 싶다고 그럴 겁니다. 그러나 본문의 욥은 비통한 심정이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신이와 거두시는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 수 있도록, 수많은 가축들과 수많은 종들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이제 거두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주신 하나님이 가져가셨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어자피 갈 때도 빈손으로 갈 것인데, 지금 내가 알몸인게 뭐 이상하냐? 이것은 이상한 게 아니고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그는, 이런 고난 중에도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다른 사람들처럼 슬픔에지지 않았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같은 심한 고난 중에도 욥은 믿음을 지키며 견디는 것입니다.

 

2. 인내 중 고난을 바르게 해석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연이어 욥에게 두 번째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이번에는 욥의 몸을 친 것입니다. 그랬더니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 몸에 종기가 나게 되었습니다. 재난이 업친 데 덥친 꼴이 되었습니다. 재물과 자식을 다 잃었는데, 이제는 자기 몸까지 심한 종기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욥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비참한 상황 속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때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9)고 말합니다. 소유물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내가, 이제는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을 지킨다는 말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욥의 아내가 말하는 것은, 이제 당신이 온전함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의미입니다. 당신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이제는 그 마음대로 하나님을 욕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근거로 볼 때, 욥의 아내는 고난을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과 당신 몸의 건강까지 하나님이 가져갔으니, 이제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를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번창하게 되었을 때는, 그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따를 수 있지만,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몸에 심한 병에 결려있는데, 하나님을 섬기고 따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의 신앙은 달랐습니다. 10절에서,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잘 이해하지 못한 아내에게, 욥은 당신의 말은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라고 하셨고, 여기서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으면 화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받았으니 화도 받겠다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견디는 욥의 모습입니다. 심한 고난 속에서 욥의 아내는 입술로 범죄 하였지만, 욥은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내뿐만 아니라 욥의 세 친구가 번갈아 찾아와서, 욥에게 권면도 하고 책망도 하고 또한 정죄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주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사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교사가 다른 사람들을 잘 가르치려면, 그 주제에 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한다면, 더더욱 어떤 주제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욥에게 찾아와서 이런 저런 말로 권면하거나 정죄하는 내용을 볼 때, 고난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인과응보(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욥이 이런저런 고난을 당하니까,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의 고난에 관하여 말하면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그들의 일관된 주장은 욥과 그의 가족들의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망할 짓을 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와서,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라고 했고요, 빌닷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8:4)라고 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군데에서 욥의 친구들이, 너와 너의 가족들의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들이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기도 합니다(4:17, 15:14).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음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욥과 변론하면서, 욥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세 친구는, 화를 내면서 욥을 정죄만 하고 있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32:2).

 

결국 이들은, 욥이 당한 고난을 이해하는 수준이나, 해석하는 방법이 거의 같았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인과응보의 원리로 이해를 했다는 것입니다. 욥과 그의 가족은 분명히 어떤 죄를 지었고, 그 죄의 결과로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음으로, 회개하면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친구들에게 욥은, 자기가 죄를 지어서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무고하며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않는 친구들은 거짓말쟁이고, 쓸데없는 의원이고(13:4-5),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변호일 뿐이라고 말합니다(13:6-13). 친구들은 고난 받는 자를 위로하기 보다는, 오히려 번뇌케 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16:2, 19:1-3).

 

욥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고난을 인과응보의 산물로 이해하지 않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경험하는 과정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와 목적을 잘 이해하면, 그 사람의 믿음이 더욱더 성숙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연단의 과정이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주의 율례를 체득하게 되는 귀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3. 인내는 소망을 갖고 기다리게 합니다.

 

인내는 단순히 고난을 참는 것을 말하지 않고, 저 너머를(미래를) 소망하게 합니다. 소망이 분명하다면 현제의 고난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장래 멋진 캠퍼스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대학생활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힘든 고등학교 시절을 인내하며 공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년에 좋은 집을 장만하여 이사 갈 희망이 있다면, 지금의 월세 단칸방에서의 삶도 잘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현제 아무리 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미래의 소망만 보이면, 지금의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은 온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고, 뿐만아니라 자기의 생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나를 선하게 인도해 주실 줄도 믿었습니다.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욥이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숨겨진 하나님을 충격적으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나, 그분을 경험하게 되면 나의 이 모든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니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욥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를 욥에게 나타내 보여주셔야만 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없이는 욥 스스로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적당한 때에 나타나실 때까지, 욥은 고난 중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바라며 견디는 것입니다.

 

소망 중에 견디는 이 시간은 나를 만드는 시간이고, 겸손해 지는 시간이고, 나를 단련하는 시간이고, 성숙시키는 시간이고, 자기를 정화하는 시간이고, 탄식하는 내면의 나를 가꾸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현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욥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욥은 순금같이 될 것을 소망하며 고난 중에도 인내하는 것입니다.

 

4. 인내는 하나님의 보응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 부분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결론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방법이 친구들보다 우수하다고 판정을 내리셨습니다. 7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고 하셨고, 8절에서도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욥의 친구들의 말이 옳지 못하고, 욥의 판단과 자세와 신앙이 옳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에게는 하나님이 노하셨다고 하셨고,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욥이 그의 친구들보다 더 나은 점이 무엇일까요? 욥은 하나님은 인과응보를 넘어서시는 분으로 알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당신의 작정과 섭리가 계시면 인과응보의 원리도 초월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것들을 초월하여 역사하실 수 있고, 하나님의 섭리로 이 세상 만물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분임을 믿은 것입니다.

 

욥의 고난도 끝이 있었습니다. 욥이 자신의 무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회의를 가졌던 부분을 회개하면서, 자신을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라고 겸손히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42:5). 이 말은 욥이 환란을 당하기 전과, 그 이후의 신앙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귀로만 듣는 신앙이었는데, 지금은 눈으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물질과 자녀와 건강을 잃었지만,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의의 하나님이 욥의 신앙을 인정하시고, 고난 후에 욥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전의 소유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자녀들도 10명을 주셨습니다. 가족들과 형제들이 찾아와 금 하나씩과 금고리 하나씩을 줌으로 욥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욥은 호된 시련 이후로 140년을 더 살았고 자손 4대를 보았으며, 나이가 들어 기한이 차서 죽게 되었습니다(210, 70인역에서는 240년을 향유하고 죽었다).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5:11). 야고보는 욥이 소망을 가지고 인내했을 때, 마침내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고, 복을 받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께서, 인내하는 자에게 좋은 결말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욥기서 전체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인내를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1. 인내는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견디는 것입니다.

2. 인내 중 고난을 바르게 해석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3. 인내는 소망을 갖고 기다리게 합니다.

4. 인내는 하나님의 보응을 받습니다.

 

우리는 욥을, 고난과 인내의 대명사로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 속에서 욥과 함께 하시고, 욥을 빚어 가시고, 욥을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정금같이 단련해 가시고, 마침내 자기를 보여주심으로, 인내의 열매를 맛보게 하셨던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욥의 인내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욥을 욥되게 하였고, 고난 중에도 인내할 수 있게 되었고, 단련되어 정금 같은 신앙자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결과로, 욥이 인내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오래 참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나를 고난 중에도 인내하는 사람으로 빚어주시고, 하나님을 만날 것을 소망 하며 인내하게 해 주시고, 마침내 정금같이 나오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보응의 은총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그 자리 다 일어서서, 가스펠 송, “주만 바라볼찌라를 다같이 부르고, 결단의 기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고난 중에도 인내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고난을 통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해 주옵소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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