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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1 - 하나님의 선하심과 양선의 열매 이은선 목사 201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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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34:6-14절 개역개정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의 선하심과 양선의 열매(34:6-14)

우리가 지난 주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자비의 열매에 대해 말씀을 나누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자신의 백성들이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면서 그들을 용납하고 받아주시는 성품입니다. 출애굽기 346절에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맛보아 우리의 삶에서도 풍성한 자비의 열매가 맺히기를 원합니다. 그 자비는 우리의 성품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자비의 성품이 행동으로 나타나 열매를 맺은 것을 양선이라고 했습니다. 양선은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비, 행동으로 나타난 자비를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양선을 가리키는 아가토수네는 신약성경에 롬 15:14, 5:22, 5:9, 살후 1:11 4곳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데살로니가후서 111절은 선함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도록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을 기뻐해야 하는데,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선은 어떤 선일까요? 모든 선을 기뻐함을 킹제임스 버전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모든 선한 기뻐함이라고 번역하여 선이 바로 하나님의 선이라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선함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의 기뻐하는 일과 믿음의 일을 우리로 성취하게 하시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고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 계신 모든 선하심을 우리의 선함을 통해 드러내시고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로 그 영광에 참여케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514절에 성도들에게 선함이 가득할 것을 요구하며, 에베소서 59절에서는 빛의 열매 혹은 성령의 열매로 이 선함(착함)”을 언급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5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선함이 가득하다는 것을 확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선을 본받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선함이 가득한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들도 서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이여 우리는 스스로 선함이 가득합니다바울은 에베소서 58-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두움 속에 있다가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빛이 되었으니, 빛의 열매가 우리에게 맺혀야 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는 것이지요. 빛의 첫 번째 열매가 바로 착함 아가도수네 즉 선함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듯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함을 닮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모든 선한 기쁨이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강력하신 역사에 따라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맺을 선함은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았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심을 따라서 우리도 선하기 원합니다. 여기에 분명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이런 저런 이유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모든 선한 기쁨을 위해 선함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양선은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의 선하심이 우리를 선함으로 인도하는 강력한 힘과 동기가 됩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맛볼 때에 참된 양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서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머리의 인식이나 정보 수준의 지식이 아니라, 삶을 통한 구체적인 체험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맛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암은 음식의 맛을 본다는 뜻으로서, 직접 경험을 통한 점검이나 확인을 의미합니다. ‘알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는 눈으로 직접 목격한다는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을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두 동사는 알다라는 의미의 가장 대표적인 히브리어 동사 야다아의 동의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다아는 단순하게 지적으로 아는 차원의 지식이 아니라 지식과 함께 경험에 근거를 둔, 살아 있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남녀가 부부생활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73절입니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제하여 점점 더 체험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요한일서 1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알려줍니다.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체험할 신앙적 주제는 여호와의 선하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하나님의 선하심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를 택하여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택함받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신실하신 것입니다. 전자가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의 고귀함이라면, 후자는 신분에 따르는 특권을 의미한다.

우리의 신분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귀중한 보물 세굴라들입니다. 출애굽기 195절에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라고 말합니다. 내 소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세굴라인데, 보배 보물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보배로운 존재로서 그의 소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29절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선택하여 자신의 소유물로 삼은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하나님께 전혀 선택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여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려고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이새는 자신의 아들들을 모아서 집에 대기시켰습니다. 그 때 다윗은 나이가 가장 어린 막내였기 때문에 집에 오지도 못하고 뜰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610절에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 때 사무엘이 묻습니다.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대답합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그를 불러 오라고 요구합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이렇게 다윗은 아버지의 눈에는 너무 어려 전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존재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양치는 목동 가운데서 특별히 찾아내셔서 왕으로 삼으시면서 그의 소유물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존재요, 하나님은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도 눈동자처럼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당당함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확신과 당당함의 근거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인자하심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는 하나님의 변함 없으심입니다. 우리를 자녀를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은 8절 하반절에 그에게 피하는 자입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복있는 자입니다. 시편 34편의 표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으로 망명을 갔었던 다윗이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미친 체해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미친 체를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절박하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선하심은 여전히 유효하며, 맛보아 알 수 있을 만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었음을 지적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겨 보호를 받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부모의 따뜻한 품과 같은 것입니다.

피하는 자에서 로 번역된 히브리어 게베르는 여자나 아이와 구별되는 남자라는 뜻이지만, 어원적으로는 강한 자, 힘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비록 피하여 숨은 자이지만, 실제로는 강한 자, 당당하게 나서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대항자가 되시기 때문에 힘있는 자가 됩니다.

그런 우리들은 복 있는 자입니다. ‘복 있는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쉬레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구체적인 결과를 의미입니다. 곧 받은 복이 삶을 통하여 대내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여호와께 피하여 그분의 품에 안겨 하늘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 결과로 아쉬레이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다윗은 그 선하심을 구체적으로 맛보아 알기 위해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누구를 의지하여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인생의 시련기에 피하여 의지해야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6절에서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너무나 곤고한 상황에서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무엘상 2110절 이하에 보면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하였습니다. 그는 도망을 쳤을 때, 아기스의 신하들이 그가 다윗인 것을 알아보자 그 앞에서 미친 체하여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의 신분이 탄로 났으면, 그는 체포되어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위기의 상황에서 그는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는 이 모습에 대해 7절에서는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그들을 건지셨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건져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렇게 놀라운 은총으로 곤고함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을 고백한 후에 8절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도다. 이 세상에서 환란을 만날 때에 피할 수 있는 참된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에게 피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던 다윗이기에 시편 23편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곳에서는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 함께 계시면서 그 분의 지팡이와 막대기인 천사들을 통해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선한 도움의 손길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는 6절에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으므로 자신의 평생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고백하였습니다.

시편 344절과 6절을 가장 좋아했던 신앙인이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었습니다. 그는 남북전쟁의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항상 이 성경 구절들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남북전쟁도 우리의 6.25 사변과 동일하게 같은 나라의 국민들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둘러싸고 싸우는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패하여 상당한 위기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4절과 6절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성경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믿으며 전쟁 상황 가운데서도 평온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미국의 남북전쟁 때 북군의 지도자들이 모인 연회장에서 교회의 대표가 링컨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북군이 승리하게 해 달라고 온 교회가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시 남북전쟁의 전황은 북군에게 불리하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대표는 그런 기도가 힘든 전쟁을 하고 있는 대통령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링컨은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가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과 같이 우리의 삶에 주의 선하심이 평생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선함을 맺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리고 있는 풍성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선하심을 당신을 통해 맺기 원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욕구를 따라 선함을 맺으십시오. 당신이 누리고 있는 주의 선하심을 그들로 맛보게 하십시오.

다윗은 이렇게 곤고한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원함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가 받는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피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10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젊은 사자는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서 여호와께 피하여 그를 경외하면 그의 삶에 좋은 것, 선한 것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 피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12절에 생명을 사모하며 연수를 사랑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4절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은 이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선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 다음의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것이 가능한가요?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과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하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악한 것들도 선으로 바꾸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모두 창조하신 후에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이것이 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선은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되어 하나님이 원하는 상태에 있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선의 원천이라는 뜻이고, 피조물이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에 합당하게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조화를 이루고 질서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들이 서로서로에게 유익을 주면서 서로에게 연합하여 아름답게 동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에 악이 들어와 선한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선한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세계에 어떻게 악이 들어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자유의지는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도 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선만을 누리고 살았고, 그러한 선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과의 선한 관계가 깨지면서 생겨나는 모든 악이 생겨나게 되었고 인간의 삶에는 그 악한 세력들이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죄악이 관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다시 죄악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해 내셔서 그들의 삶에 다시 선을 회복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생겨나는 악한 일들을 다시 선으로 바꾸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미워하여 애굽의 장사꾼들에게 팔았지만 창세기 5020절에 보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어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란 요셉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악한 환경을 선한 환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선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목자로 오셔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게 우리를 푸른 초장 쉴 말한 물가로 인도하시면서 우리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이 말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안식으로 바꾸어 주리라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8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그의 구원의 예정은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선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에서는 악한 것이 바뀌어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선한 길로 인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길을 인도하면 우리는 악에게 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3413-14절에서 말씀합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은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우리에게 어떻게 선의 열매가 맺힐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선하신 주님을 따라 살면서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고, 그러한 가운데 바로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길 때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라 선포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에베소서 210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재케 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우리를 존재케 한 이유를 바울은 선한 일과 연결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고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선하게 창조된 사람은 선한 존재가 돼서 선해야 살아야 합니다. 거듭난 새 사람으로 부르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존재로 부르시고 선한 일을 하게 하심으로 악한 세상을 고쳐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디도서 2:14에서는 선한 일과 구원을 연결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예수 그리스도가 불법과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보면 착함과 선행은 힘들다고 포기해도 되는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안타깝게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원하는 바 선은 하나도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바, 악만 행할 정도로(7:19) 죄에 묶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 받았기 때문에 충분히 선할 수 있는 역량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성령께서 그 힘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사모하시고 적극적으로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구하고, 그 능력으로 살아갈 때, 착함을 막고 있는 세상에서도 착하고,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러한 선한 행위들은 파급력을 가지고 있고, 전파력을 가지고 퍼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선으로 악을 이겼고 그것을 통해 기독교의 복음을 힘있게 퍼져 나갔습니다. 선함과 착함이 주는 영향력은 큽니다. 그 영향력에 들어선 이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구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5:16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벧전 2:12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착한 행실, 선한 일의 영향력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욕하다가도 너희의선한 모습을 보고 신앙의 길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무슨 말입니까? ‘너희의지독한 모습 보면, 정나미 떨어져 도망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 구원에 이르는 부르심의 과정에 우리의 선한 행위를 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보잘것없는 나의 작은 선함이 놀랍게도 부르심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10:42절 말씀 기억해 보세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단한 선행이 아닙니다.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만 줘도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선행은 규모가 아니라 자세고, 마음입니다. 작고, 크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선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선은 작아도 충분히 귀하고,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잠언 229절에 "선한 눈을 가진 사람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눈을 가졌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보는 눈을 뜻합니다. 영어 번역으로 보면 bountiful eye라고 하였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눈이란 뜻입니다. 언제나 남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퍼줄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양선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신뢰함이 없이는 악한 세상에서 선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저력이라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세상의 악에 대항해서 싸우시고 선함을 드러내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두 번째 요소인 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에서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고마웠다라는 이야기를 배우자에게서, 이웃에게서 듣는다면 여러분들은 착하게 산 것입니다. 더 이상의 찬사는 없습니다. 이 고백을 많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꼭짓점은 입니다. 선행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먼저 선해야 합니다. 독해지라는 세상의 압력에 지지 말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선해져야 합니다. 이 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삶에서 이러한 선행의 열매가 맺히기를 원하고, 교회적으로도, 특히 지금 우리와 첨예하게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선으로 악을 이겨서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관계에서 참된 양선의 열매가 맺혀야 하겠습니다. 양선은 악한 속에서도 선을 행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선함'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 머물지 않고 그가 가진 가능성과 '선함'을 일깨워주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선함''선함'에서 끝나서는 안 되고 그 '선함'이 더욱 널리 전파되게 하는데 진정한 '선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만 착한 일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선함' 때문에 자극을 받아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의 열매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그리하여 널리 선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함'을 성령의 열매에 포함시킨 이유가 바로 악을 참아내며 이길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선함'을 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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