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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3 14 -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기도 이정현 목사 202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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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6:11-13절 개역개정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제공: 대한성서공회

6:11-13,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기도

 

예가기도의 구조는 간단히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호칭, 간구, 그리고 송영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부르고, 그 하나님께 몇 가지를 간구하며,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멘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6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 세 개의 간구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기도이고, 다음에 나오는 세 개는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간구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세 가지 간구는 지난번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이고, 세 번째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입니다. 간단하지만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그 뒤를 이어서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기도 세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입니다.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적 필요를 구하는 중요한 기도입니다.

 

본문의 양식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양식이 육체적 양식을 말합니까? 아니면 영적인 양식을 말합니까? 물론 성경에는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양식은 일차적으로 사람이 먹고 배부르며 만족을 얻는 먹을거리를 말합니다. 빵이나 떡이나 쌀이나 야채나 과일 그리고 고기 등등을 말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들의 육체를 보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양식은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안 먹고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장해 하셨고 과일을 구하셨고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계실 때에는 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날의 양식을 먹어야 영양분을 공급받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굴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30:8).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양식을 혹자는 영적인 양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식을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광의적으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말을 인정한다면, 여기서의 양식은 일차적으로 육적인 먹을거리를 말하지만 그 외의 영적인 것이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닌줄 압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이 같은 광범위한 것을 의도하셨는지는 모르나 일차적으로 육적인 양식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구하되 매일매일 구하고, 또 가까운 미래에 필요한 것까지를 포함하여 간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일용할이라는 말은 다가올 가까운 미래를 포함한 현재를 가리키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욕심을 부려서 1달치, 1년치의 먹을거리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날에 필요한 양식, 아니면 2-3일 분량의 양식을 간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날그날 필요한 양식만 구하면 됩니다. 내일 필요한 것은 내일 또 구하면 됩니다. 오늘 먹을 양식이 있으면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또 기도하면 내일의 필요한 양식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용할이라는 말과 오늘날이라는 단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를 이렇게 하면 됩니다. ‘오늘 우리 가족들에게 필요한 양식은 오늘 주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필요는 오늘인데 내일 주시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자녀들의 그날그날의 필요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시며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필요한 날에 필요한 것을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 생활을 합니다. 출애굽 한 지 한 달쯤 지나서 양식이 떨어지니까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원망을 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갓씨 같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은 만나였습니다. 이 만나는 매일 매일 주셨습니다. 한 가족 당 한 오멜(2.27리터)의 양식을 거두라고 하셨고, 아침에 거두어야 하고 욕심을 부려 많이 거두어 내일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먹어 썩어서 냄새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그날그날 주시는 하늘의 양식이므로 그날그날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날그날 필요한 양만큼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200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일의 양식으로 40년 동안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의 이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있으면, 이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까? ‘나와 우리 가정은 한 달 먹을 양식이 있다거나 농촌에서 가을에 추수를 하였기 때문에 1년 먹을 양식이 있다면 이 기도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이 넘쳐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달라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는 평생에 걸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못 먹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날의 양식을 애타게 구하는데 얻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다는 사실입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기근 실태는 어제 오늘의 일만이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 더 잘 살고 이런 일이 없어야 하는데 세계의 현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국기아대책기구 국제개발원에 따르면 1인당 1일 영양공급 권장 칼로리가 2,400칼로리지만 1,500칼로리 미만을 섭취하는 인구가 아시아 지역에 35천 명, 아프리카와 남미지역에 15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한 5세 이전의 유아사망률은 선진국이 1,000명 중 5명 내외인 반면 중앙아시아와 중동은 100명 이상, 아프리카는 200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해마다 100만 이상의 어린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사망을 한답니다. 모기장만 쳐줘도 되는데, 그것이 없어서 무고한 어린아이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나 먹을 것 있다고, 쌀독에 쌀이 있고 냉장고에 부식이 있고 통장에 돈이 있다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사람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배 부르다고 다른 사람의 굶주림과 고통을 외면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에 양식이 있다고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는데도 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게 되며, 하나님의 것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매일의 필요한 것으로 만족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관계된 두 번째 기도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이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신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 기도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다 용서 받았는데 왜 또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킨 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한 것 등등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성화 차원에서 지속되어야 할 요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이미 몸이 깨끗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씀 중 본문의 용서는 발 씻는 행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의 삶이 늘 연약함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하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따라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빚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과녁에서 빗나간 생각과 말과 행동입니다. 죄는 불법이며 불순종입니다. 죄는 들어가지 말라는데 들어가는 것이고 들어가라는데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거역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법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불행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죄 지은 것을 후회하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우리의 용서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가 우선이냐, 아니면 이웃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우선이냐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의존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선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자가 적게 용서하며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용서하는법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여기에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먼저 나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것을 근거로 이웃의 과실을 용서합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18:21)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 이상의 죄에서 용서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악한 종의 비유’(18:23-35)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는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트렌치는 이것이 미화 16,500,000달러에 해당되는 돈이라 했다; 수백 억 원에 해당하는 돈) 빚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빚을 갚을 길 없어 임금에게 호소했더니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은혜 입은 이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너무 적은 돈이다) 빚진 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대노하여 그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18:32-33)라고 책망하면서 그 종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비유 말미에 주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자기 힘으로 결코 청산할 수 없는 거대한 빚을 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용서받았건만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한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주석가는 사죄를 받은 죄인은 그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이 비유의 주된 교훈을 기술했습니다.

 

주인이 악한 종을 불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33)고 한 말씀 중에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그 용서의 은혜를 주위에 베풀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착한 일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833절에 나와 있는 마땅하지 아니하냐......?”(Should you not......?)라는 말은 이것이 너의 영구적인 의무가 아니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죄에서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받은 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이웃에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끝으로 여기에 첨가하고픈 것은 이 간구가 단순히 개인적인 죄에 대한 용서뿐 아니라 신앙공동체 전체의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 직장, 사회와 이 민족의 죄와 정치인들의 죄를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매일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 이 민족의 죄는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거짓, 사기, 음란, 성추행, 술 취함, 방탕, 동성애, 테러, 낙태죄, 자녀 살인, 무자비, 우상숭배,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사이비, 이단, 착취, 비리, 한탕주의, 내로남불 등등의 심각한 죄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우리의 죄를 안고 가슴을 찢으며 눈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심각한 마음과 겸손한 자세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회복될 수 있고 회개해야 은혜를 입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주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첫 번째 간구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였고, 두 번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며, 이제 세 번째 기도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오늘의 문제를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이고,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는 어제 잘못된 것에 대한 문제이고, 그리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는 아직 내가 당하지 않은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문제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문제만을 가지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미래의 문제를 놓고도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먼저 해결해야 할 점은 ‘13절의 문장이 한 가지 간청인가 아니면 두 가지 기도인가?’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되어있습니다. 한글 문장만 보면 이것은 분명 두 개의 간청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악에서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간구로 봅니다.

13절의 기도문은 하나인데 시험이나 악에서 우리를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두 가지 요청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전반절의 시험’(temptation)과 후반절의 ’(the evil one)은 서로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반절은 부정문으로 되어 있고 후반절은 긍정문으로 서술하고 있을 따름이지 결국 내용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나 악에서 구해달라는 말은 거의 동일하다는 얘기입니다

 

시험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험도 있고, 사단으로부터 오는 시험도 있고,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욕심이나 정욕으로 인해 당하는 시험도 있습니다. 예가기도에서 말하는 시험은 바로 사탄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리말해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의 원뜻은 우리가 시험에 복종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항복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표현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들어가는)것을 허락지 마소서라고 하거나 또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고 번역을 합니다. 결국 이 같은 표현은 전부 마귀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이 사단의 시험에 넘어지거나 거기에 굴복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유혹한 사단은 지금도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시험하는 자이고 우리를 삼키고자 다니는 우는 사자이고 옛 뱀이며 시험의 덫을 가장 잘 사용하는 원수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시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사단으로부터 시험과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 승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 시험, 사자의 시험, 이방인들의 시험, 악형의 시험, 희롱과 채찍과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맞고 톱으로 켜는 시험, 궁핍의 시험을 당하여도 초대교회 신자들은 믿음으로 이겼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런 사람들을 시험한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교묘하게 시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다니면서 신자들을 밀 까부르듯 하기 위하여 쉴 새없 이 청구한다고 했습니다.

 

이 원수의 시험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마귀의 시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언제 표적이 되어 어떤 시험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에서 먹는 것 때문에, 이성 때문에, 명예심 때문에, 혹자는 돈 때문에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해서 쉽게 노하고 싸움하는 것으로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같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우리가 사단의 시험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시험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를 잘 해야 합니다.

 

먼저는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원수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우선 준비해야 할 것은 말씀 충만입니다. 이때의 말씀은 성령의 검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악한 원수의 화전을 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데 그 가운데서 원수를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예수님도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시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는 자를 물리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을 통하여 말씀 충만해야 원수의 유혹을 분별할 수가 있으며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기도 없이 어떻게 원수의 시험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무장해서 그것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의 시험을 이겨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단히 기도함이 없다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시험 앞에 너무나 연약하고 시험하는 자는 강한 놈이기 때문에 기도하여 성령의 도움을 입지 않고는 결코 사단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시험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아서 결국 시험에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적의 공격의 기미를 제일 먼저 알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는 군인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적의 공격을 예의주시하는 파수꾼이나 경계병처럼 늘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적이 침입할 때 다 맥없이 넘어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깨어있지 못함으로 다 주를 부인하고 주님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를 멀리하면 시험에 들기 마련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적게 기도하면 적게 은혜 받고 많이 기도하면 많이 은혜 받고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만 닥쳐온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만 닥쳐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이라는 단어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악한 자입니다. 악은 중성이지만 악한 자는 남성입니다. 악한 자는 악보다 더 넓은 개념이며 단수로 되어 있으므로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악한 자이므로 마귀를 말합니다. 세계 최초의 악도 그렇지만, 이 세상의 모든 악은 바로 이 악한 자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놈은 악의 근원이요 뿌리입니다.

 

악에서 구하소서또는 악한 자에게서 구하소서라는 말은 사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원수를 사탄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사탄은 ’, ‘원수’, ‘하나님의 자녀를 고소하며 넘어뜨리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라고도 표현을 하는데, 이는 참소하는 자’, ‘쐐기를 박는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쐐기를 박아서 서로 갈라놓는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부부를 갈라놓았고, 가인과 아벨 형제를 갈라놓았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갈라놓은 놈이 바로 마귀입니다. 바로 그 악한 자의 지배와 통치를 받지 않도록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져 악에 떨어지면 원수는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더 죄악의 구렁텅이로 우리를 몰아가며 더 처참하게 짓밟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그 놈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바로 그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시험에 들지 않았을 때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았을 때, 평안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악한 자로부터 구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시험에 들었을 때입니다. 시험에 들었다고 다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에 빠졌을 때 그 속에서 죄를 범하지 말고 빨리 그곳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악한 놈의 손아귀에서 허우적대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건져달라는 기도입니다.

 

히브리서 2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고 하셨고, 베드로후서 29절에서는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날마다 주의 은혜로 승리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은 우리를 위한 세 가지 기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1)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2)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3)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주신 기도의 한 단어 한 단어,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를 살펴봄으로 깨달음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배우고 은혜받은 자답게, 우리도 주님처럼 기도하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 주기도문 송...

기도 제목/ 일용할 양식과 죄 용서와 시험 중에 여러분에게 시급한 기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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