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목사설교

  • 홈 >
  • 예배 · 설교 >
  • 이정현목사설교
이정현목사설교
2022 06 19 성령님의 열매(1) 이정현 목사 2022-06-19
  • 추천 0
  • 댓글 0
  • 조회 549

http://www.isomang.net/bbs/bbsView/13/6102562

5:22-23, 성령님의 열매

 

오늘부터는 성령님의 열매에 대하여 알아보기 원하는데,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한가지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의 성령의 열매를 말하기 이전에, ‘육체의 일에 대하여 말했는데, 이것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일성령의 열매하고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선 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일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하여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입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은 육체의 일들을 구체적으로 무려 16가지로 나열을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면, 결국 이와 같은 악한 결론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행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결국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한 결과를 말하고, 이어서 성령의 은사를 따라서 행한 결과는, 성령의 열매임을 말하며, 그 열매를 나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말씀, 즉 육체의 일과 반대되는 일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사는 삶의 스타일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가, 아니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180도 서로 다릅니다.

두 번째 알아야 할 사항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9가지 은사와,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하고는 어떤 관계인가? 열매라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를 행함으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행하면 반드시 이런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은사는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주어지는 것인데, 그 은사를 따라서 교회의 일에 성실히 봉사하면, 이런 열매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열매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열매가 없는 성령의 은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성령의 열매를 통하여 참된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듯이, 성령의 열매를 보아서, 저분의 은사가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것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그 나무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성령의 은사를 잘 사용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맺은 열매를 통하여, 내가 성령으로부터 은사 받은자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기 이전에는 육신의 지배를 받았다면, 이제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성령의 열매 맺는 사람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며,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

이제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성령의 열매는 9가지인데, 여기서는 시간 관계상, 앞에 나오는 4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입니다. 일단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고(요일 4:1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요일 4:10).

 

인간 편에서의 사랑에는 두 방향이 있는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듯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7-40). 여기에서 분명히 주님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네 이웃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하는가 하며는, 하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고, 이웃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두 방향을 정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해야 합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런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새 계명을 주시기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사랑해요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아무리 좋은 은사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사랑을 바탕으로 그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랑을 말하고, 13장으로 넘어가면 전부 사랑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사랑이 은사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며, 이는 사랑을 근거로하여 은사를 사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동사여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랑은 최고의 덕이다’, ‘천국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 거하는 세계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3,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좋은 사랑의 열매, 많이 맺는 소망의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보고 인사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제가 먼저 섬기겠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입니다. 희락을 말하는 헬라어는 카라인데, 이는 기쁨, 즐거움, 유쾌, 행복을 뜻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값싼 승리에서 오는 기쁨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반을 둔 기쁨을 말합니다. 이런 기쁨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히 있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바울도 하나님 나라는 성령에 의한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교훈하셨습니다(14:17).

 

혹자는 사랑이 있는 곳에 희락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으면, 사랑하는 자도 기쁘고 사랑을 받는 자도 기쁜 법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자의 얼굴에는, 수심과 번민과 고통의 그늘이 있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납니다. 희락의 필요성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도 신앙을 건전하게 하려는 것과,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려는 것입니다.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나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제가 히스기야의 예배회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200년 만에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과 남쪽 유다 백성들을 다 불러서 유월절과 무교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정말 감격 중에, 은혜스럽게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예루살렘 성에 지금까지 없었던 큰 기쁨의 희락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대하 30:26). 이처럼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뿐만아니라, 예배자들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70인 제자들의 전도보고를 받으셨습니다.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주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10:17-21). 무엇인 참 기쁨의 원인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내가 기뻐해야 할 근거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귀신들이 쫓겨나고 대단한 이적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 가족 한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로 나와서,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내 친구가, 내 이웃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며 또한 내가 준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16:22).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도, ‘이 기쁨이 저들 안에 충만히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17:13).

 

주님의 이같은 축복의 결과로 제자들은 기쁨으로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하였더니, 곳곳에 복음으로 인한 기쁨의 역사가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2)고 하셨고, 사도행전 8장에서는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었을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8)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이런 기쁨이 우리 안에도 충만하고, 우리가 속히 배곧에 복음으로 전하여 배곤 성안에 복음으로 인한 큰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의 빌립보 감옥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안에서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셨고, 항상 기뻐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참된 기독교인들의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경과 상관없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런 전천후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

다음은 화평입니다. 화평도 성령의 열매인데, 흔히 평화, 평강이라고도 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화평이란 단어보다는 평강이란 단어로 많이 번역했습니다.

 

바울은 개인이나 교회에 문안 인사를 할 때, 유난히 은혜와 평강을 함께 사용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로마교회를 향해서도(1:7),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도(1:3), 그리고 갈라디아교회를 향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들에게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5:1, 2:41).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로 인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단절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보내주심으로 이 관계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평강의 왕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9:6), 원수된 관계를 화목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0-11).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사이였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화목한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사람들은, 그 연장선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께서 우리를 화평 중에 부르셨고(고전 7:15), 화평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8-19).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직책을 따라,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화평케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리라’(5: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된 증표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서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을 지정하지 않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화평함을 따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딤후 2:22).

 

)성 프랜시스의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를 써 주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네 번째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조급하지 말아야 하고, 쉽게 분노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온전한 인격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인격을 다듬어 가시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인내와 견딤을 말합니다. 오래 참음을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는지, 오래 참음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하십니다. 야고보서 120절에서는,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인내인데, 관계적 의미에서 인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 또한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인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μακροθυμία)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인내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인내는 궁극적으로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인내라고 하면 가장 기억에 남고, 대표적인 인물이 욥입니다. 그의 인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5:11). 가장 자비하시고 가장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욥의 인내를 아시고 보시고 들어셔서, 그에게 이전보다 배로 큰 은혜와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6에 말하기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였고, 갈라디아서 6:9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인내, 오래참음의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승리합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문제 해결을 받습니다.

결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를 주신 것은, 열매를 위하여서입니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시대는 열매를 구하기보다 꽃을 구하는 시대이다라고 했는데, 성경은 열매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는 다 은사와 달란트가 주어졌습니다. 주어진 은사를 선한 청지기같이 잘 사용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약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악한 열매만 거둘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의 식구들은 절대적으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성령의 은사에 따라 행함으로, 성령의 열매 맺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의 열매를 탐스럽게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22 06 26 성령의 열매(2) 운영자 2022.06.30 0 657
다음글 2022 06 12 히스기야의 예배회복 운영자 2022.06.12 0 6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