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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6 26 성령의 열매(2) 이정현 목사 202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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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라디아서5:22-23절 개역개정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5:22-23, 성령님의 열매(2)

 

2/4분기 마지막 주일입니다. 4-6월까지의 주제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라는 주제로 3개월 동안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성령님에 대한 마지막 설교 시간으로 지난주에 이어서 성령님의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는 사랑, 희락, 화평 그리고 오래 참음의 열매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마지막 5가지를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서 설교는 간단히 요약해서 하고 대신 좀 더 세밀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들은 홈페이지의 설교 원고를 살펴보시면 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 다섯 번째는 자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자비(라함)는 하나님의 인자하심’(19:19), 하나님의 인애라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대상 16:41).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의 자비란 인자, 인애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 중의 하나입니다.

 

신약에서의 자비(크레스토테스)는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만인에게 실천하여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긍휼하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9:13), ‘친절의 의미도 있습니다(11:22).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kindness, 친절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비롭고 인자하시며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비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비를 입었음으로, 긍휼하심을 받았음으로, 인자를 입었음으로 우리도 그것을 남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하심을 누군가에게 흘려보내야, 또다시 긍휼하심은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달란트 비유를 다 마치시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모아서 자기 오른편에 둘 양과, 왼편에 둘 염소로 나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엄청난 축복의 말씀과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때에 영접하였고 36 헐 벗었을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굉장한 축복의 말씀은, ‘너희를 위하여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그들에게만 단 한번 말씀하시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35절과 36절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에는 ‘...할 때6번 나타나는데,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입니다. 내가 그런 지경에 있었을 때, 내가 그런 상황 속에서 남몰래 눈물 훔치고 있었을 때, (너희)가 나에게 자비와 긍휼과 인자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37절 이하에서 기가 막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주님의 결론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에게, 특별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밑바닥에서 하루하루를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주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신 사회적 약자들을 포함하여 이방인(19:34), 고아(7:9-10), 궁핍한 자(5:7), 약한 자(20:35), 우는 자(12:15), 이웃(15:2), 시험을 받는 자(6:1-2), 고난 중에 있는 성도(4:32), 과부(딤전 5:9-10)들입니다. 이런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자비는 성령의 귀한 열매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자비와 긍휼을 이웃들에게 그대로 베푸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마지막 날에 주님 오른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왼편에 설 것인지가 판가름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자비의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 오른편에 서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섯 번째 성령의 열매는 양선입니다. 양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가도수네’(agathosune)인데, 이는 착함, 올바름, 너그러움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한문으로는 어질 양(), 착할 선()을 써서 어질고 착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선은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열매이기도 합니다(5:9).

 

성경에서 양선은 그냥 ’()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15:14, 살후 1:11).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선은 일반적인 윤리와 도덕적 범주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단순히 착하게 산다고, 그것을 선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이상의 삶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선을 행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선의 열매는 성령님이 세상에 뿌려 주시는 단비와 같은 것으로,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빠르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어질고 착한 행위는, 마치 성령님이 뿌려주시는 촉촉한 단비와 같은데, 그것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빠르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자랑도 교만도 아닌 것으로, 마치 숨 쉬는 호흡과 같은 생활속의 행위적 운동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6)고 하셨습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는 평생에 싫어하던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요, 다른 하나는 여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고 6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히틀러의 마음속에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히틀러의 아버지가 행상인이었는데 밖으로 많이 돌아 다녀서 그 어머니가 고독을 견디지 못해 이웃의 유대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어머니께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는데도 어머니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히틀러의 마음속에 유대인과 여자에 대한 분노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여자를 멀리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죽이는 잔인한 독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 특히 지도자의 생각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결국 히틀러는 어질고 착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세계사에 심각한 악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일곱 번째 성령의 열매는 충성’(faithfulness)입니다. 충성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네에만’(ne’eman)은 나라, 조직, 지도자 등을 위해 몸바쳐 순종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성은 종이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 노아와 모세(12:7), 요셉과 아브라함(9:8)은 대표적인 충성가였습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받은 자와 달리, 그 일에 열심히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25:21-23). 중요한 것은 주인이 그 자리에 없고 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하여 배의 이문을 남긴 것입니다. 그들은 돌아온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입니다(16:10). 작고 보잘 것 없고 하찮게 보이는 일이라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그 일에 성실한 사람이, 크고 중한 일도 성실히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느 목사님의 딸이 큰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직원이 10만 명 정도 되니까, 미국에서 상위 2-3위 안에 드는 대그룹이라고 합니다.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는데, 이 자매가 회사 돈을 쓰면 1불까지도, 영수증 처리를 해서 정확하게 올리고 보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윗 사람이 회장님께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어느날 회장님이 직접 이 자매를 불러서, 너는 어떻게 이렇게 회삿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정확하게 영수증까지 첨부해서 올리느냐고 묻자, ‘나는 믿는 사람으로서, 물질의 청지기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감동을 받은 회장님이, 그 목사님의 딸을 그 회사 이사로 승진을 시켰는데, 연봉이 3억원이 넘고요, 한국인으로서는 최고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회사를 위하여 작은 일에 충성하였더니, 큰 일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아버지 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충성을 다함으로서, 만인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3:2, 2:17).

 

바울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4:2). 맡은 자는 복음의 비밀을 맡았고, 달란트를 맡았고, 가정을 맡았고, 재물을 맡았음으로 그 일에 충성을 다하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파에 성실해야 하고, 맡은 여러 가지 달란트를 따라 성실하게 봉사해야 하고, 맡겨진 가정생활에 성실해야 하고, 맡겨진 재물을 잘 관리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2:10).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죽을 힘을 다해서,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계속하여 변질과 배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 가운데서도 불신앙적인 태도를 버리고 오직 끝까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더 남긴 사람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삶으로, 충성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온유입니다. 온유(gentleness)자기를 낮추다, 겸손하다,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는 겸손, 동정, 너그러움과 비슷한 의미의 낱말입니다. 동정심을 가지고 이웃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를 가리켜,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12:3)고 했습니다. 당시 그 시대의 사람들보다 모세의 온유함이 더 뛰어났다는 표현입니다.

 

주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11:29)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단정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팔복강화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5:5). 사기성이 있고 폭력을 행사하고 전쟁을 벌여야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질서에 인내하시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함과 온유함을 보이셨습니다(2:5-8, 53:7). 그가 채찍에 맞으며 곤욕을 당하고,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신 온유한 주님이셨습니다.

 

중세기의 버나드눈이 비둘기와 같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고, ‘보나벤츄라는 너무 온유했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 말하기를, ‘보나벤츄라를 보면 아담의 범죄 전과 같아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온유한 사람은 자석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온유한 사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따른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분냄과 성냄과 강퍅함과 폭력과 양육강식이 강한데, 이런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온유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분쟁과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피하고 온유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딤전 6:11). 하나님의 사람들은 피해야 할 것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따라야 할 것은 적극적으로 따라야 하는데, 온유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로 옷 입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3:12).

 

중국의 한 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에 상창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노자의 스승이었습니다. 어느날 노자가 스승을 찾아가서 사부님, 사부님께서 세상을 뜨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동안 노자의 얼굴을 보던 상창이 입을 열어, “내 이빨이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노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상창이 내 혀는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노자가 사부님의 혀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상창은 , 이제 알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노자는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하고 큰 절을 드리고는 물러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노자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혀와 이 중에서 이가 더 강한 것 같으나, 혀가 더 오래 갑니다. 이는 늙어지면 다 뽑혀 나가지만, 부드러운 혀는 오래갑니다. 노자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부드러운 사람만이, 오래 남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9번째 성령의 열매는 절제’(self-control)입니다.

 

절제란 육체적 충동을 억제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극기와 자제력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의 정욕과 쾌락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극기를 의미합니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자기 몸을 단련하기 위하여 음식을 절제하듯이(고전 9:25), 그리스도인들도 절제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성욕도 명예욕도 물질욕도 절제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고전 9:25)한다고 했습니다.

 

잠언서 기자 솔로몬은 정욕의 통제력이 성을 빼앗는 군사보다 낫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잠언 16:32). 성을 빼앗는 군사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그 용사보다 자기의 정욕을 절제하는 사람이 더 위대하다고 한 것입니다.

 

절제는 영적 지도자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자동차에 있어서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서 어디에서 어느 순간에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며, 또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욕망과 욕심이 있으며,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때에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 때에 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것처럼,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하지 못하면,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벧후 1:6) 더하라는 말씀에서, 절제된 지식과 덕을 통하여 인내를 쌓고, 그 인내를 통하여 경건 생활을 유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도사람들은 절제하기 위하여, 가부자세로 며칠밤을 지세우기도 하고, 불교인들은 고행과 수도를 하지만, 결코 성경적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내 힘과 내 지혜와 능력으로는 절제할 수 없음으로,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와 통치와 도움을 통하여, 절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절제의 열매를 많이 맺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이와 같은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율법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따라서 살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전 성경 말씀과 부합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성경에 부합한 말씀임으로, 우리는 마땅히 열매를 많이 맺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너희가 열매를 맺으면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깨끗케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과실, 즉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며, 더 정결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망교회 모든 성도들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맺어서, 농부이신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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